스포 없는 캡틴마블 후기 취미생활




- 원작의 캐릭터 탄생 과정을 여러모로 각색했는데,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려는 노력이 보인다. 캡틴마블에게 능력을 주는 존재가 원작의 남성(원조 캡틴마블)에서 크리 문명 자체로 바뀌었다. 원작의 주요 남성 캐릭터 중 하나를 주인공이 존경하는 여성 캐릭터로 바꿨다. 나중에는 약간의 반전을 통해 캡틴마블의 능력은 ‘남이 부여한 힘’이 아니라 ‘스스로 자각한 힘’이라는 걸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캐릭터의 주체성을 높였다.

- 원작의 캡틴마블이 그다지 막강한 캐릭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마블의 히든카드’ ‘타노스를 무찌를 유일한 희망’이라는 수식어가 의아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의문이 풀린다. 의문이 풀리는 순간(즉 파워업의 순간) 쾌감도 있다. 

- 영화를 보고나면 왜 페미니즘 대전(?)이 벌어졌는지 의아할 정도로 모난 곳 없고 무난한 대중영화다. 페미니즘 서사가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블랙 팬서’처럼 주제의식을 전면으로 드러내는 수준은 아니다.
능력을 자각하는 순간, 성별 때문에 억압받던 캡틴마블의 어린 시절 모습들이 몽타주로 제시되는데 그때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그들이 각각 다른 여성으로서 함께 일어나 연대하는 듯한 느낌으로 연출돼 있다. 이 대목이 약간 감동적이다. 그밖에도 페미니즘의 성격은 이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키는 장치로서 잘 쓰이고 있다. 영화의 오락성을 해치지 않는다.

- 영화가 느리다. 연출도 편집도 10년 전 정석적인 리듬이지, 요즘 블록버스터의 리듬이 아니다. 훨씬 빠른 편집에 익숙해져 있는 요즘 관객들에겐 밋밋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1990년대를 배경으로 복고풍 영화를 만드느라 그 시절 영화 문법까지 다시 가져왔나? 내겐 전혀 거슬리지 않았지만 젊은 관객들이 ‘지루했다’는 후기를 남기는 걸 보며 대중영화가 엄청 급해졌구나 싶음.

- 원작의 크리-스크럴 전쟁을 소재로 가져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재창조했다는 점은 신선했다. 마블 영화는 원작을 잘 아는 관객들의 뒤통수를 치려는 경향이 늘 있는데(‘아이언맨3’에서 만다린의 정체 등)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스크럴이 지구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 대충 아는 관객들에겐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외계인의 침공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라는 단순한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외계의 여러 세력이 각각 다른 입장과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주인공이 그중 어느 쪽을 지지할지 결정해야 하는 영화가 되었다. 즉 윤리에 대한 이야기가 되면서, 조금은 깊이가 생겼다.

- 두 눈이 모두 남아있는 닉 퓨리, 여전히 뻣뻣한 연기를 하는 콜슨, 무한한 힘의 원천이라는 ‘코어’의 정체 등 MCU 팬들에게 더 재미있는 요소가 많다. 다만 어벤저스라는 팀명의 유래가 밝혀지는 장면 등 무리하게 짜맞춘 팬서비스라고 느껴지는 대목도 있었다.
약간의 설정충돌이 생긴 듯 싶지만 그 정도는 신경쓰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드래곤볼’이 단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재미만 있다면 설정 따위 사소하게 뒤집어도 상관 없는 것이다.

- 솔트-앤-페파와 너바나의 음악, CD롬 읽는 소리 등 추억을 건드리는 복고 요소가 많다. 삽입곡은 워낙 명곡들이라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지만, 복고 코드 자체는 너무 뻔하게 활용해서 재미가 없었다. '원더우먼 1984'는 이렇지 않기를.

- 캐스팅 논란이 국내에만 있었는지 미국에서도 있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브리 라슨이 못생겼다는 어이없는 소리와 끝없는 외모지상주의는 일단 넘어가고, 원작과 느낌이 맞는 캐스팅인지만 생각해보자면, 나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만화 캐릭터의 외모를 브리 라슨이 못 따라간다는 건 코웃음이 나는 소리다. 만화 캐릭터의 외모를 어떻게 따라가나? 그럴거면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을 배우로 쓰던지 '만찢녀'로 유명한 코스어를 쓰지. 왜 영화배우를 쓰나?
캡틴마블은 원작 속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노출이 없는 복장을 하고, 긴 생머리를 모히칸 헤어로 바꾸는 등 중성적인 스타일로 변해 온 캐릭터다. 활동명도 미즈마블에서 캡틴마블로 바꿨다.
일부 남성팬들이 아쉬워하는 에밀리 블런트 같은 경우, ‘메리포핀스 리턴즈’에서 보여준 것처럼 날카롭고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느낌이 그 배우의 개성인데, 캡틴마블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완전히 안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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