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랩 속에 박제된 마약상의 이미지를 구원하다 취미생활


한줄요약 : 영화 <문라이트>에 대해, 영화를 여는 노래가 불러온 연상작용으로 시작해 요즘 힙합 가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글입니다.

빈민가 출신 흑인 소년의 성장담은 영화에서 그리 흔하지 않지만, 힙합 음악에선 지겹도록 반복된 소재다. 래퍼들은 대부분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음악에 그대로 투영하기 마련이다. 그들 중엔 마약상 출신, 유명 갱단 출신 래퍼들도 수두룩하다. 거리 출신이 아닌 래퍼들도 마치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dope, drug, ice, skurr 등 마약과 관련된 표현을 노래에 넣는 게 일상적이다. 이제 마약에 대한 가사는 어떤 비장미도 없이 그저 유희의 도구로 쓰인다. 마약과 범죄에 대한 서사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고착된 장르적 특징이 됐다. 
다른 래퍼들이 틀에 갇혀 있을 때, 켄드릭 라마는 한 발 벗어난 시선으로 걸작을 만들었다. 메이저 데뷔작 <good kid, m.A.A.d city>는 폭력이 일상화된 LA 컴튼에서 켄드릭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야기한다. 치밀한 영화적 구성, 갱스터 랩의 전통을 계승하고 비틀어 만드는 장르적 진보를 통해 이야기한다. 여느 래퍼들처럼 ‘마약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우린 너무나 비장하고 그게 우리의 현실이지’라는 투로 현실에 안주하며 멋있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삶이 켄드릭이라는 개인에게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남겼는지 이야기하며 폭력에서 벗어날 것을 다짐한다. 그 과정은 전에 없이 감동적이다. 폭력에 매료된 일군의 래퍼들, 폭력을 멀리하라고 훈계를 하는 일군의 (약간 지루한) 지적인 래퍼들 사이에서 켄드릭은 가장 예술적인 지점을 찾아낸다.
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완결된 것처럼 보였기에, 두 번째 앨범이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2015년 나온 <To Pimp a Butterfly>는 세간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첫 트랙 <Wesley's Theory>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의 탈세 문제가 인종차별에서 비롯됐다는 음모론을 인용하며, 연예인이 된 현재의 켄드릭도 인종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걸 단박에 선언하고 시작한다. 전작이 LA 힙합을 계승하고 비틀었다면, <TPAB>는 흑인 선배들이 해 온 재즈, 훵크, 힙합 등 모든 장르를 앨범 하나 속에서 동시에 계승한다. 켄드릭은 메시지의 외연과 형식의 외연을 동시에 확장하며 자신의 걸작을 뛰어넘었다.

<TPAB>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문라이트>의 도입부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보리스 가디너가 부르는 “모든 검둥이는 하나의 별”이라는 노래로 시작된다는 점이 두 작품의 큰 공통점이다. 원래 히트한 노래였던 <Every Nigger Is A Star>는 켄드릭의 앨범을 여는 첫 샘플링 곡으로 선택돼 2015년의 청중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2016년에는 극장의 관객들도 이 노래를 잊을 수 없게 됐다.
<TPAB>는 2015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지 못해 엄청난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유명한 앨범이다. <문라이트>의 관객, 특히 흑인 관객 중엔 1년 전 <TPAB>를 통해 이 노래가 익숙한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미디어들도 두 작품의 연결고리를 지적했다. 켄드릭의 잔상이 영화의 첫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베리 젠킨스 감독은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연상작용은 영화의 감상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의미를 풍부하게 느끼도록 돕는다. 주인공 샤이론의 삶은 수많은 래퍼들이 이야기해 준 흑인 소년의 전형적인 성장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는 약쟁이인 소년이 마약상을 유사 아버지로 삼아 성장해야 하는 곳. 우발적인 폭력으로 전과가 생긴 청소년이 살아남기 위해 마약상이 되는 곳. 3장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1부와 2부의 샤이론이 아직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3장의 샤이론은 갑자기 근육이 잔뜩 붙은 당당한 마초(물론 영혼은 그렇지 않다)의 외모로 바뀌어 있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이라는 개인에 집중하고 있지만 어머니와 후안의 언쟁 등 샤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마을의 현실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럴 때 <Every Nigger Is A Star>를 통한 연상작용은 <문라이트>를 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고발 드라마처럼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문라이트>는 장르 안에 박제되어 버린 흑인 마약상이라는 소재를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되살려냈다. 이 영화가 기존의 게토 이야기와 다른 건, 물론 샤이론이 동성애자이며 자신의 정체성에서 기인한 슬픔을 안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샤이론의 가슴엔 메워지지 않은 구멍이 있고, 우린 배우의 눈을 통해 그 구멍이 얼마나 깊고 먹먹한지 느낄 수 있다. 3장에서 샤이론을 연기한 트레반트 로즈는 스포츠 스타의 근육(부상으로 은퇴하기 전엔 100m 달리기와 풋볼 선수였다고 한다)과 50센트를 닮은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눈빛은 슬프다. 슬픈 눈의 50센트라니. 로즈의 근육과 눈빛이 일으키는 부조화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다.
힙합 음악이 익숙한, 특히 남부 힙합(샤이론이 3장에서 마약상으로 일하는 지역이 애틀랜타다)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마약상 이야기에 아무 감흥이 없을 정도로 무덤덤해진 상태다. 그들은 <문라이트>를 보고 비로소 감각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르적으로 추상화된 마약상이 아니라, 실제로 어딘가 존재할 슬픈 마약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 닳고 닳은 소재는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문라이트>는 진부한 힙합의 서사를 진화시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술 면에서도 ‘마약 랩’의 한계를 대신 깨뜨려주는 느낌이다. 수많은 래퍼들이 거리의 현실과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늘어놓지만, 클리셰 속에서 아무리 디테일을 더해도 거기엔 살아있다는 느낌이 부족하다. 오히려 <문라이트>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미학을 통해 주인공 개인의 감정과 영혼에 다가갈 수 있게 하고, 흑인 마약상 이야기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다. 게토 버전의 마술적 리얼리즘.

인상적인 음악으로 가득한 <문라이트>에서 블랙(샤이론)과 케빈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 흘러나오는 <Classic Man>은 약간 이질적이다. 지데나와 로만 기안아서(둘 다 원더랜드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이며, 테레사 역으로 출연한 자넬 모네가 이 레이블의 CEO다)가 함께 불러 2016년 그래미 송/랩 콜라보 부문 후보에 올랐다. 지데나는 나중에 ‘지니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노래가 어떻게 <문라이트>와 어울리는지 설명한다. "나의 음악과 <문라이트>는 모두 흑인의 남성성을 재정의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문라이트>는 평범한 후드(hood) 이야기를 비틀었다. 내 음악도 전형적인 힙합이나 알앤비가 아니다."
지데나, 모네 등 몇몇 아티스트들은 <문라이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흑인의 남성성(black masculinity)을 거론한다. 남성성이란 용어는 보통 남성이 사회에서 습득하는 젠더 정체성을 지칭한다. 빈민가 흑인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은 1장에서 샤이론을 돌봐주는 후안이다. 샤이론은 롤모델로 삼을 만한 게이 남성이 없는 환경(흑인 빈민가뿐 아니라 어디서건 성소수자가 처하기 쉬운 문제로 알려져 있다)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할 만한 후안의 직업과 생활방식을 의도적/운명적으로 복제한다. 그는 블랙이라는 스트릿 네임까지 지었다. 그러나 흑인 남성성을 열심히 모방하는 블랙의 근육 뒤엔 샤이론의 여린 영혼이 있다는 걸 관객들은 계속 느끼고 있다.
흑인 남성성을 흉내 내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느 밤 해변에서 케빈과 함께 한 비밀스런 기억만이 샤이론을 살아있게 했다.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벗어나 케빈에게로 향할 때 블랙은 비로소 샤이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흑인 남성성의 클리셰에 빠져 있는 건 수많은 래퍼들뿐 아니라 극중 샤이론 자신이기도 했다. 롤모델을 찾지 못한 샤이론은 자신에게 솔직해지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케빈에게 안겨 있는 샤이론,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파란 달빛 아래 어린 샤이론은 기분 탓인지 더이상 슬픔에 차 있지 않은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다.

**마침 요즘은 애틀랜타 출신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래퍼 영썩이 앨범 표지에 여장한 사진을 올려도 ‘fag*ot’이라는 백안시를 당하지 않고 개성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힙합계 안의 고정관념이 희석되어 가는 시기다. 랩과 노래의 경계를 오가는 아티스트중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걸 당당하게 밝히는 인물도 생겼다. 프랭크 오션, 시드 더 키드같은 성소수자 아티스트들은 흑인음악에 기반을 둔 가장 뛰어난 작업물들을 내놓으며 성별에 따른 역할놀이에 갇혀 있던 흑인음악을 해방시켰다. 그런 면에서 <문라이트>는 팝계의 흐름과도 잘 조응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는 작품이기도 하다.

G
M
T
음성 기능은 100자로 제한됨
G
M
T
음성 기능은 100자로 제한됨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