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존 버거의 사계>를 봤다. 영국 출신이며 알프스에서 살고 있는 철학자 존 버거의 사계절을 다룬 네 편의 다큐멘터리를 묶은 영화다. 버거와 20여년째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는 틸다 스윈튼이 한 편을 직접 감독했고, 본인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출연시키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스윈튼 없이 만들어진 두 번째 영화, ‘봄’ 편이다. 버거의 봄은 그가 사는 농촌 마을의 동물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봄’은 네 개의 단편 중 가장 버거와의 접점이 적다. 버거는 직접 출연하지도 않는다. 제작진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버거의 마을까지 찾아가놓고도 그를 만나지 않은 채 주변을 빙빙 돌며 마을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버거에 대한 추적을 대신한다.
버거의 말은 진부하지만 새삼스러운 것이다. 돼지 주인은 돼지에게 정을 주고, 돼지를 잡아 고기를 얻는다.(기억에 의존한 인용이라 부정확함) 이 두 문장은 ‘그러나’로 연결되지 않고 ‘그리고’로 연결된다. 인간은 잡아먹기 위해 가축을 기르고, 가축의 존재 가치는 죽은 뒤에야 비로소 발생한다. 그런데 살아있는 가축에게 인간은 정을 붙이고 이름도 만들어 준다. 영화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여러 질문을 거쳐, 자크 데리다가 제기한 문제의식까지 다룬다.
아래 내용은 영화와 별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나는 개라는 동물에 대해 애정과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다. 조금이다. 인스타그램에서 개 주인 몇 명을 팔로하며 그들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정도. 그러나 차마 개를 기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때로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개라는 종은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인간은 한 개체가 아니라 종 전체를 책임져야 한다. 일종의 원죄 같은 것이다. 유전자 단위에서부터 나에게 의지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존재를 내가 맡는다면, 나는 그 존재를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나와 주고받는 관계가 너무 부족해 불행해지진 않을까? 사랑을 갈구하는 그 눈빛에 나는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 것인가?
현대 도시인인 나와 내 아내와 개가 한 가족을 이룬다면, 두 주인이 집을 오래 비운 동안 개는 어떻게 될까? 이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나는 개를 영영 기르지 못할 것이다. 아이가 태어난 뒤, 비슷한 나이의 강아지를 입양하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해 봤다. 이번에도 결론은 비슷했다. 나는 인간의 아이를 부양할 수 있지만, 개의 아이를 책임지기엔 미숙한 인간이다.
한때 좋아했던 가수가 자기 강아지에 대한 노래를 앨범에 실은 적이 있다. 강아지는 1인칭으로 노래한다. 아빠는 모르지만 나는 사실 한글도 읽을 수 있고, 아빠가 내 밥은 조금 주면서 친구들 불러다 이것저것 처먹는 걸 다 알고 있다고. 하지만 아빠를 사랑한다고. <마이 펫의 이중생활> 한국판 주제가 정도 되는 가사다.
그 노래의 존재를 뒤늦게 안 뒤, 그 가수에 대해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관심이 뚝 끊겼다. 애견인으로서 자기 반려동물이 더 영특할 거라고 귀여운 환상을 갖는 건 자기 마음이다. 그러나 자기 강아지가 영특하다면 더 불행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개는 무조건 행복할 거라는 대책 없는 낙관을 들으며, 나는 그의 세계관을 신뢰할 수 없게 됐다. 인간끼리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감정은 서로 눈치챌 수 없는 법인데, 강아지의 눈빛과 몸짓만 보고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세상을 해석하는 그의 방식이 지나치게 천진하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진짜 인성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동물에겐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으니까. 동물을 괴롭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의 인성을 신뢰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옆에 있는 동물이 행복할 거라고 너무 쉽게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겠지만,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엔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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