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 - 이야기는 힘이 세다 취미생활


* 스포 투성이

마블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마블 영화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작가 개인의 개성적인 예술을 벗어나 매우 뛰어난 공산품의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다. ‘마법적인 순간’을 블록버스터에 기대하는 건 애초에 무리겠지만, 최소한 개성이나 도전의식 정도는 있어야 영화에서 활력이 느껴지고 상영 시간 전체가 즐거워진다. 요즘 블록버스터는 도전조차 시스템 속에서 한다. 
흥미로운 장면이 많았으나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던 <어벤저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비해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는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기획이다. 감독의 이름만 봐도 차이가 난다. 두 차례의 <어벤저스> 팀 업을 지휘했던 조스 웨든은 기술자보다 창작자에 가깝다. 출세작 <버피 더 뱀파이어 슬레이어>나 (비운의) 실패작 <파이어플라이> 등 자기 작품의 아이디어와 집필, 연출을 모두 맡았다. <엑스맨>을 비롯한 몇몇 코믹스에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반면 <시빌 워>의 루소 형제는 미드 출신이라는 점만 조스 웨든과 비슷할 뿐, 구체적인 경력은 창작자보다 전문 연출자에 가깝다. ‘찍사’다.
대신 루소 형제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저>에서 보여준 것처럼 스토리를 안정적으로 전개하는데 연출의 중점을 둔다. 멋진 장면을 통째로 살리기 위해 서사적으로 필요한 장면을 들어내는 짓은 가급적 자제하는 것 같다. 반면 웨든은 인물들의 매력을 함께 고조시켜 멋진 클라이맥스를 뽑아낼 줄 알고, 복잡한 인물 관계도 속에서 좋은 대화 장면을 이끌어낼 줄도 알지만 기본적으로 서사 중심으로 사고하는 창작자는 아니다. 
<에이지 오브 울트론>과 <시빌 워>가 악당을 소개하는 방식을 보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웨든은 울트론의 탄생 장면에 긴 분량을 할애하고, 그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면을 잔뜩 집어넣었다. 반면 <시빌 워>의 바론 제모는 별다른 탄생설화 없이 곧장 이야기 속에서 출몰해 서사의 한 축으로 기능하며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인장을 남긴다. 그의 개인사가 소개되는 건 한참 뒤, 그것도 잠깐이다. 결과적으로 제모는 인상적인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성공했다. 치밀한 서사의 한 축이라는 건 그 악당의 음모가 치밀했다는 뜻이고, 그건 그 악당이 강력하다는 뜻이며, 악당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강력함 아닌가.
캡틴 아메리카의 이름을 걸고 나온 영화답지 않게 <시빌 워>에는 새로운 어벤저가 두 명이나 등장하는데, 블랙 팬서가 소개되는 방식 역시 서사의 큰 틀을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 안에서 전개된다. (스파이더맨의 경우 별도로 소개하기 위한 장면이 잔뜩 들어 있지만 영화 제작 도중 합류했다는 걸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티찰라의 능력이 뭔지 좔좔 설명하는 변사도 없고, 티찰라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스케치도 매우 짧다. 티찰라는 영화 속으로 성큼 들어와 첫 모습을 보여준 뒤 아버지의 죽음, 복수를 위한 추격, 두 편으로 갈린 어벤저들과의 자연스런 싸움, 사적 복수의 포기라는 개인 서사를 통해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준다. 역시 자연스럽다.

지금은 시각효과로 덕지덕지 칠해진, ‘찍었다’기보다 ‘그렸다’고 부르는 게 적절한 영화들의 시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다. 서사가 빈약하면 시각효과는 의미를 잃는다. 블록버스터 감독의 가장 큰 미덕은, 좋은 시나리오를 받아든 뒤(직접 쓸 필요는 없다) 그걸 해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엑스맨> 시리즈에 성공적으로 복귀한 브라이언 싱어, 온갖 프랜차이즈를 성공적으로 리부트하고 있는 J.J. 에이브람스의 가장 큰 장점 역시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다. 싱어는 그야말로 이야기꾼이고 에이브람스도 떡밥질을 통해 상영시간 내내 관객이 뭔가를 궁금해 하게 만든다.
어차피 멋진 장면은 무술감독과 후반작업에게 맡기면 수준급으로 뽑히는 세상이다. 예를 들어 싱어가 만든 <엑스맨 2>의 액션은 (나를 비롯한 소수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긴 했지만) 다수의 관객들에게 지나치게 느리고 박력이 없다는 인상을 줬던 반면, 11년 뒤 같은 감독이 만든 <엑스맨 :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액션은 충분히 현란했다. 액션 연출만큼은 싱어보다 몇 수 위라고 인식되곤 하는 매튜 본의 <엑스맨 : 퍼스트 클래스>와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초능력 대결 장면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 거대 규모의 블록버스터에서 ‘액션 장인으로서의 감독’이란 이제 허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첫 번째 팀업 영화를 만들 연출자론 웨든이 더 적임자였을 것이다. 어벤저들이 한 팀으로 모여 싸우는 장면을 보며 덕후들의 탄성을 이끌어내는 힘은 분명 웨든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캐릭터는 소개가 끝났고, 이젠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전개되야 한다. 슈퍼 히어로를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나려면 그들의 삶이 흘러가야 하고, 그것이 곧 서사니까.

추가 단상

1. 지구-616의 완다는 스칼렛 비치라고 불려도 할 말 없는 대재앙급 정신병자였지만(개인적 감정은 없습니다. 특정 캐릭터를 싫어할 정도로 열렬한 마블충은 아님) MCU의 완다는 자꾸 본의 아닌 실수를 저지르고 그게 부각되며 점점 연민을 자아내고 있다. 물론 배우가 엘리자베스 올슨이라 그렇기도 하겠지 넘나매력적인것..
2. 코믹스 원작의 <시빌 워>를 큰 틀에서 따르고 있지만 캡의 캐릭터는 오히려 엑스맨 리더 시절의 사이클롭스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Scott was right처럼, 영화의 비밀이 밝혀질 때 우린 Cap was right을 외칠 수 있다. 물론 마지막에 살인마 친구와 손을 잡고 희생자 가족 친구를 다구리하는 건 안 right...
3. 마지막에 어벤저스를 두 패로 가를 바에야 캡의 <시크릿 어벤저스>, 토니의 <뉴 어벤저스>를 갈라서 각자 영화를 만들면 꿀잼이지 않았을까?
4. 비전의 어색한 분장마저 받아들이게 만드는 폴 베타니의 기품 있는 대사 연기.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사랑을 실사로 구현했을 때 설득력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폴 베타니가 해낸다
5. 원작의 <시빌 워>가 철학적, 윤리적 문제를 다룬 반면 영화가 지나치게 개인적인 동기로 각색해 급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던데, 내가 느끼기엔 완전히 반대였다. 원작 <시빌 워>는 거창하게 시작했지만 패싸움을 몇 번 벌인 뒤 용두사미로 끝나는 이벤트(마블 크로스오버 이벤트 중 용두사미 아닌 게 더 드물지만...)였다. 영화판의 캡은 1940년대 미국인다운 자유주의와 버키에 대한 개인적 우정을 모두 따르고 있으며, 버키를 돕는 것이 자기 신념과 배척되지 않는다는 걸 설득력 있는 대사로 설명하기도 한다. 
6. 잠깐 나온 와칸다가 엄청난 기대를 갖게 함. 믿고 보는 감독까지 고용됐으니 이제 성공만 남은 듯
7. 새 스파이더맨 영화에 아마데우스 조나 노바가 나왔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 <얼티밋 스파이더맨>의 설정에 맞춰.


덧글

  • 나이브스 2016/05/02 23:15 # 답글

    DC에서 마블 간 앤 잘 됐는데...

    마블에서 DC 간 사람은...
  • redz 2016/05/04 22:29 #

    배트맨 솔로무비가 DCEU를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희박한 확률로)
  • 진주여 2016/05/03 02:08 # 답글

    캡틴과 아이언맨이 싸웠는데

    어째서 DC가 지는걸까..
  • rumic71 2016/05/03 18:45 #

    잭 스나이더가 하이드라의 스파이라...
  • redz 2016/05/04 22:29 #

    마블과는 반대로 스튜디오 시스템이 실패했기 때문에...
  • rumic71 2016/05/03 18:47 # 답글

    * 애초에 블록버스터와 작가주의를 한 데 놓고 볼 수 없지요.
    * 제모남작은 매우 유능하긴 했지만 '강하다'는 느낌은 잘 못 받았습니다. 멘탈은 오히려 약해보였고.
  • redz 2016/05/04 22:28 #

    물론입니다. 부연하자면 과거엔 블록버스터는 아예 비평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최근엔 진지한 평론의 대상이 되었고, 평론가들이 높게 치는 블록버스터는 블록버스터인 동시에 작가주의적인 영화들이죠. 마블은 공산품인데도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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