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 순수한 오락영화를 어디까지 잘 만들 수 있는가 취미생활


<세븐>도 물론 멋진 영화였지만 <세븐>을 보다가 <조디악>을 보면 <세븐>은 완전 아기 영화, 유치원 애가 똥 싸는 영화예요.

<살인의 추억>은 어떻게든 흥분시켜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잖아요. 감정적이고 찔찔 싸고. <조디악>은 차분히 가라앉아서 리듬을 장악하는데 완전히 충격이었어요.


봉준호가 한껏 오버하면서 데이빗 핀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낼 때 했던 이야기다. 정말이지 초기작의 핀처와 조디악 이후의 핀처는 다른 사람 같다. <세븐>과 <파이트 클럽>의 핀처가 기껏해야 ‘톡톡 튀는 MTV 감독’ 정도였다면, <조디악> 이후의 핀처는 말 그대로 영화를 엄청나게 잘 찍는 연출의 마스터로 보인다. 잔재주를 잘 부리는 축구선수와 공을 엄청나게 잘 차는 축구선수의 차이, 이를테면 데니우손에서 지단으로 변한 것 같은 느낌.


그런데 핀처의 최근작인 <나를 찾아줘>는 마스터의 영화라고 말하기 힘들다. 거장의 아우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핀처에 대한 오래된 기사가 생각났다. <패닉 룸>에 대한 씨네21의 기사였는데, 핀처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를 ‘필름’과 ‘무비’로 구분한다고 했다. 필름은 비교적 야심만만한 영화, 즉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말한다. 무비는 별 야심 없이 만드는 오락영화로 초기작 중엔 <더 게임>과 <패닉 룸>이 있다. 핀처는 <세븐> <더 게임> <파이트클럽> <패닉룸> 순으로 작업하며 필름과 무비를 번갈아 만들어 왔다.


핀처가 아직도 이 분류법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찾아줘>는 핀처식 용어로 ‘무비’에 속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조디악>처럼 화면에 보이는 것 이상을 품격 있게 전달하며 평론가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다. 대신 오락영화로서 엄청나게 깔끔하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더 쫄깃하게 반죽해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핀처의 역할 전부다. 이때 핀처는 작가나 거장이 아니라 오락영화의 장인이기를 자처한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별다른 액션이나 특수효과도 없는데, 심지어 감동적이지도 않은데, 순수한 오락적 쾌감만으로 단 1초도 지루하지 않은 영화.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건 어쩌면 걸작을 만드는 것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핀처는 그만큼 영화를 잘 만든다.


핀처의 연출은 종종 절묘한 콘티로 영화의 결을 살리기도 한다. 나는 닉(벤 애플렉)과 에이미(로저먼드 파이크)가 비슷한 행동을 하는 두 개의 신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초반, 닉은 집 밖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뒷문을 열어 밖을 살핀다. 투명한 덧문 안에 불투명하고 튼튼한 문이 있는 이중 구조다. 영화가 중반으로 접어들었을 때 에이미도 비슷한 행동을 한다. 이때 에이미가 여는 문은 닉이 열었던 문과 거의 똑같이 생겼고, 둘이 담기는 구도도 비슷하다.


(글씨가 흐린 부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두 인물을 시간차를 두고 비슷한 방식으로 찍은 건 영화적 구조를 통일시킬뿐 아니라, 두 인물이 비슷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영화가 첫 번째 반전을 지나면 에이미가 나쁜 년으로 보이지만, 에이미 역시 닉과 비슷한 불안을 겪고 있다는 걸 안 뒤엔 그녀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중요한 건 이 장면을 계기로 에이미와 닉의 관계가 가해자-피해자가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대결을 하는 느낌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간단한 연출만으로 두 인물을 보는 관객의 시선을 바꿔버린다.


벤 애플렉의 무색무취한 연기는 이 영화에 더없이 잘 어울려 보였다. 벤 애플렉은 대충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감정 없이 연기한다. 닉이 그런 인물이라서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나를 찾아줘> 전체가 감정 없는 영화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는 미저리에 가까운 아내와 부정을 저지른 남편이 벌이는 두뇌싸움이다. 사회적인 함의도 없고, 관객이 인물에게 공감할 필요도 없다. 벤 애플렉은 연기의 톤을 통해 ‘이건 순수한 오락영화야’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영화의 결말은 결혼제도에 대한 도발적 해설이다. 그러나 나는 전혀 복잡해지지 않은, 깔끔한 머리로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그게 핀처의 의도라고 느꼈다. 최고급의 킬링 타임을 만끽하고서.


덧글

  • 2014/10/25 08:52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4/10/25 19:37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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