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댄싱9’의 애청자다. 평소에 보고 즐기는 춤이라곤 K팝 댄스와 비보잉 뿐인 내게 ‘댄싱9’에 등장하는 다양한 춤은 새로운 즐거움을 준다. 특히 이번주 방영분에서 현대무용 안무가 김설진이 선보인 춤은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안겼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라면 내가 언제 벨기에 피핑톰 무용단에서 활동하는 김설진의 안무를 볼 수 있겠나.
위성방송이 발달하기 전 시대, 월드컵을 보는 사람들의 기분은 내가 ‘댄싱9’을 보는 기분과 비슷했던 것 같다. 각 나라의 축구 스타일은 좀처럼 서로 조우하기 힘들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을 통해 축구 스타일은 교류하고, 상호 발전한다. 인테르밀란의 리베로 시스템은 이탈리아 대표팀을 통해 세계로 전파되고, 아약스에서 먼저 만든 토털풋볼은 네덜란드 대표팀을 통해 세계로 전파됐다.
그러나 지금은 위성이 전 세계를 잇고 있는 시대다. 영화 ‘그래비티’에 나온 것 같은 케슬러 신드롬이 전 세계의 위성을 격추시키지 않는 한, 우린 다음 시즌에도 분데스리가와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생중계로 보고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래서 노이어에 대한 호들갑은 좀 당황스럽다. 노이어는 이번 월드컵에서 남다른 활동량과 커버 범위를 보이며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일 언론은 독일 대표팀과 스위퍼키퍼의 만남에 열광하며 베켄바워에 빗대기도 했다.
노이어의 활동량(m)
포르투갈전 : 노이어(4951) < 파트리시우(5631)
가나전 : 노이어(4702) > 다우다(3834)
미국전 : 노이어(4815) > 하워드(4018)
알제리전 : 노이어(5517) > 음볼리(3465)
프랑스전 : 노이어(5338) > 요리스(4771)
노이어는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다. 1950년대부터, 포지션 체인지가 잦은 팀들은 자기 시대의 표준보다 조금씩 진보한 골키퍼를 기용해 왔다. 1954 월드컵 당시 헝가리의 그로시츠, 1970년대 네덜란드의 용블루트도 당대 골키퍼 중엔 튈 정도로 활동반경이 넓었다.
스위퍼키퍼라고 할 수 있는 첫 골키퍼는 1980년대 말 아약스에서 활약한 스탠리 멘조다. 수리남 출신 흑인 골키퍼 멘조는 동시대 골키퍼 중 발이 빠르고 민첩한 편이었다.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토털 풋볼 아래서 공을 자주 다뤘고 최종수비수 노릇을 할 때도 많았다. 산더 베스터펠트는 한 인터뷰에서 “내가 기억하기론 요한 크루이프가 아약스에서 스탠리 멘조를 그렇게 활용한 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어린 시절 베스터펠트에게 멘조의 독특한 플레이는 강한 인상을 남겼고, 베스터펠트도 활동 반경이 넓은 골키퍼로 성장했다.
1990 월드컵과 1992년의 룰 변화는 골키퍼 발전사의 중요한 기점이다. 골키퍼들의 시간 지연 행위 때문에 백패스 금지 규정이 생겼고, 골키퍼들은 발로 공을 능숙하게 다뤄야 짧은 패스 플레이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 흐름에 성공적으로 적응해 1995년 아약스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일조한 골키퍼가 반데사르다. 반데사르는 시대를 앞서간 골키퍼였다. 유벤투스 이적 당시 센터백들은 반데사르의 숏패스를 받고 화를 냈다고 한다. 야! 왜줘! 그냥 뻥 차!
알렉스 퍼거슨은 늙은 여우답게 반데사르의 스타일 중 잉글랜드에서 써먹을 만한 것만 쏙쏙 빼먹었다. 반데사르 영입 이후 맨유의 빌드업 방식은 부분적으로 변했다. 당시 반데사르가 공을 잡으면 퍼디난드와 비디치가 좌우로 넓게 벌려 서고, 측면 수비수는 더욱 전진해 공을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맨유는 반데사르를 스위퍼로 인정하고 볼 배급의 기점을 맡겼다.
잉글랜드에서 스위퍼키퍼와 비슷한 철학을 갖고 있던 팀은 리버풀이다. 리버풀은 1980년대 초 주전이었던 그로벨로가 주창한 바에 따라 골키퍼의 활동 반경이 넓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유소년 골키퍼를 육성할 때 다른 팀보다 적극적인 전진을 주문한다. 바르셀로나 출신 페페 레이나가 리버풀로 이적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레이나는 몇 차례 개그로 기억되는 골키퍼지만, 전진 압박이 중요한 무기였던 당시 리버풀에서 넓은 배후 공간을 혼자 책임진 훌륭한 스위퍼 키퍼였다. 공 배급 능력도 훌륭했고.
노이어는 어느 골키퍼보다 과감하게 튀어나가고, 손으로 던진 공이 하프라인을 넘을 정도로 배급도 잘하고, 깐죽거리는 플레이도 잘한다. 가장 돋보이는 스위퍼키퍼인 건 맞다. 그러나 노이어를 적극적으로 쓰는 감독은 뢰브보단 과르디올라다. 과르디올라의 변태적인 노이어 활용법을 한 시즌 내내 지켜본 우리가 왜 새삼 독일의 노이어를 보고 감탄해야 하는가. 노이어에 대해 이야기할때면 ‘새로운 플레이’라는 과장 대신 ‘최근의 조류를 잘 반영한 플레이’라는 설명이 낫지 않나. 노이어는 ‘미래에서 온 골키퍼’도 아니고 ‘폴스5의 창시자’도 아니다. 지난 수년 동안 유행한 흐름을 가장 잘 반영하는 골키퍼일 뿐이다.
사람들은 국가대항전에서 벌어지는 전술적 실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유로 2012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스페인이 세스크를 최전방에 세운 건 분명 파격이었지만, 클럽 축구에서 제로톱을 지겹게 본 사람들이 ‘스페인이 새로운 공격 방식을 제시했다’고 말한 건 침소봉대였다. 심지어 당시 스페인의 가짜 9번은 그다지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세스크는 대회 내내 진짜 9번처럼 최전방에 머물러 있었지, 메시나 토티처럼 독창적인 움직임을 갖는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월드컵에서 시작된 유행이 클럽 축구로 이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월드컵이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무대니까 전술적으로도 가장 진보된 대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클럽 축구에서 닳고 닳은 유행이 월드컵에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남아공월드컵을 휩쓴 4-2-3-1은 클럽 무대에서 십년 남게 유행한 포진이었다. 이번 대회에선 3-5-2가 유행하는데, 막상 유행을 선도한 팀인 유벤투스는 3-5-2의 한계를 절감하고 포백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지금 월드컵은 새로운 유행의 발원지가 아니라 유행의 ‘끝물’이다. 월드컵에 미래는 없다. 가까운 과거와 현재가 있을 뿐이다.
덧글
이미 우리나라도 김병지라는 탈아시아급 희대의 골키퍼를 가지고 있었고요...
그의 전성기의 움직임과 능력은 세계 정상급 이었죠....
아직도 기억다는 수많은 다이빙 원핸드 캐치들....
다만... 2002년을 준비하면서 NO.1 골리였던 김병지가 딩크 할배한테 밉보여서....
그 뒤로 우리나라 리그의 골키퍼 활용법은 시대에 뒤쳐진듯한 느낌이...
(물론 2002년을 기점으로 세계적으로 골키퍼의 활동반경이 기존보다 약깐 적어 지기는 했죠...)
그런 현상을 그냥 redz 님 께서 쓰신것과 같이 "월드컵을 통해 그 전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방식을 보게 되는" 효과의 하나로 봐주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위성이 연결되어 있어 생중계로 분데스리가, 프리미어 리그, 세리에 A 등의 경기를 볼 수 있게 환경이 조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걸 꾸준히 챙겨 보는 사람보다는 여전히 해외 리그의 축구를 많이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한국 선수가 출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경우에 더 가깝다고 말씀 드릴 수 있겠네요 ^^;; 아무래도 국내 선수가 출전하면 많이들 찾아보시는 것 같더라고요 ㅎㅎ 저는 축구보단 야구 파 인지라...^^;;)
redz 님께서 쓰신 내용에 틀린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분데스리가나 프리미어리그, 아니면 하다못해 유럽 챔피언스리그만 꾸준히 챙겨봤더라도 아마 '와.. 노이어!! 얘는 진짜 새로운 방식의 골키퍼다!!' 라기보단 redz님 글의 내용대로 '아, 노이어 얘는 진짜 시대의 흐름을 잘 반영한 골키퍼구나.' 하는 생각으로 끝날 수 있었겠지요 ㅎㅎ
하지만 이런 '호들갑' 의 긍정적 측면도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 월드컵이 아니면 축구에 전혀 관심도 없던 저 역시 이번 월드컵을 보고나서 한 두가지씩 호기심이 생겼는데 그 호기심이 그 전의 저는 보지 못했던 방식의 '스위퍼키퍼' 노이어에 대한 호기심과 '왜 메시는 A매치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일까?' 였습니다. 그 덕에 스폐셜 영상 몇 편이라고는 하지만 노이어와 메시의 클럽 경기 모습들을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런 관심이 지금은 '하다못해 챔스라도 꼭 챙겨봐야겠다.' 싶은 생각으로 바뀌었으니까요 ㅎㅎ
그리고 클럽축구를 전혀 안보는 그냥 보통의 남자 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노이어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슈퍼세이브, 하프라인 근처 (심지어 시즌 경기를 보니 하프라인을 넘어서..;; 어시스트를 기록하기도 하고.. 장난 아니더라고요;;) 까지 나와서 수비를 하는 '스위퍼키퍼' 의 모습, 발로 차나 손으로 던지나 거기서 거기인 볼 배급 범위 (표현이 맞을진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손으로 던질 경우 단순히 높이 띄워 멀리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선수가 마치 '패스를 받듯' 자연스럽게 골이 연결 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아래쪽으로 깔아 주듯 던지는 것 같더군요) 뿐만 아니라 '월드컵' 이라는 무대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노이어의 용기 비슷한 (깡에 가까운)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redz님 께서 말씀하신대로 월드컵이라는 무대가 전술적으로 가장 진보된 무대라거나 실험적인 전술을 시험하는 무대라거나(특히 조별예선이나 평가전일 경우) 하는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월드컵은 '중요한' 무대라는 것 이겠지요.. 그 때문에 많은 팀들이 미완성의 전술을 실험하고 경험하기 위한 무대이기보다는 완성된 하나의 팀으로서 좋은 성적을 목표로 하고 매 경기마다 '승리' 를 목표로 하는 가장 치열하고 완성도 높은, 완성도가 높아야 하는 무대가 아닌가 합니다. 골 한골에 희비가 갈리고 심지어는 네이마르의 부상에 브라질 마피아가 '죽여버리겠다.' 고 얘기 했을 정도로 (조금 과장된 감은 역시 있지만) 생사가 갈리는 무대가 아닌가 싶은데요 ㅎㅎㅎ
그런 무대에서조차 평소 자기의 스타일대로 경기를 하는, 심지어 자칫 잘못하면 실점으로 직결될 수 있는 플레이를 보여준 노이어에 대해 유난히 열광하게 되는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물론 몇 경기 본 것은 아니지만 시즌 경기들의 스폐셜 영상만 보더라도 이번 노이어의 월드컵 경기는 '비교적' 안정적인.. ? 모습을 보인것 같더라고요 ^^;; 아무래도 월드컵이다보니 지나치게 과감한 플레이는 자제 하였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가지, 몇 편에 불과한 노이어 관련 영상을 보고 난 뒤에 든 생각이라 저 역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노이어의 모습을 보면 하프라인 까지 나왔다가 단순히 빠른 속도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노이어가 걷어 낸 공을 상대 선수가 잡았을 경우 그 선수가 슈팅을 할 수 있는 각도를 줄여가면서 들어가 혹시 있을지 모르는 중거리 슈팅까지 대비한 움직임을 계산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물론 이거야 저는 영상을 몇 편 봤을 뿐인지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마음에 안든다며 비난하는, 보장된 익명성의 뒤에 숨어 제 멋대로 써 내려가는 글이 아니라 제대로 된, 타당한 이유가 있는, '왜 그렇게 말 하는거지?' 라고 생각해서 '아~ 그래서 그런거구나.' 하고 납득 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가 담겨 있는 redz 님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