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티-이탈리아 여행] 로마로 가는 길에 만난 토티의 동료 왼쪽 서랍


내 책 <프란체스코 토티 : 로마인 이야기>(이하 <토티>)의 집필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올해 2월, 내게 유럽 출장 기회가 생겼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거치는 출장 뒤에 휴가를 며칠 붙여 <토티>를 쓰기 위한 답사를 하기로 했다. 회사의 양해를 받은 뒤 허겁지겁 답사 준비를 시작했다. 일찌감치 인터뷰 신청을 했다면 토티 본인, 혹은 토티를 잘 아는 로마 관계자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시간이 없었다. 로마 구단과 접촉하는 건 취재 신청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취재 신청 과정을 돌이켜보면 거의 코미디와 같았다. 욕심이 생긴 나는 금요일 피오렌티나(vs 유벤투스), 토요일 나폴리(vs 라치오), 일요일 로마(vs 베네벤토) 홈 경기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중남부 경기 일정을 발견했다. 경기 상대도 대부분 화려했다. 급히 세 구단에 취재신청을 넣었다. 아무리 세리에A 입장권 구매가 쉽다지만 미리 기자석을 예약해놓고 간다면 현지에서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경기를 볼 때마다 기사만 하나씩 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구단의 미디어 안내 문구에 따라 정해진 날짜, 정해진 서식에 맞춰 신청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취재가 거절당했을 경우 거절 통보를 해 준다고 명시돼 있었는데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심지어 ‘읽음’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피오렌티나만 뒤늦게 취재 허락을(격식에 맞는 이메일로) 해 줬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나는 이메일 계정을 바꿔가며 나폴리와 로마 측에 추가 메일을 보냈고, 메일을 확인해 달라는 메일을 또 보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나폴리와 로마 모두 매우 뒤늦게, 경기 전날 저녁에 취재를 허가한다는 통보를 해 줬다. 특히 나폴리의 답신은 가관이었다. 나는 격식에 맞는 영어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는데 나폴리의 답신은 딱 두 단어 “OK, accreditation!” 뿐이었다. 정말로 느낌표까지 찍혀서 왔다. 나폴리 담당 직원은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강한 의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영어로 신청하시면 경기 X일 전까지 답신해 드립니다’라고 써 있던 미디어 안내 문구는 개뻥이었던 모양이었다. 다들 대충 신청 메일을 보낸 뒤 대충 들어가서 대충 취재하는 시스템인 것으로 짐작됐다. K리그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짧은 이탈리아 여행 내내 느낀 '이래서 반도 국민성 비슷하다고 하는구나'의 첫 순간이었다.

여전히 취재 승인이 났는지 불투명한 상태에서 파리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그날 파리에는 눈이 많이 왔다. 폭설이라고 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뜻밖에도 파리의 대중 교통은 거의 마비 상태였다. 충분히 일찍 출발했다고 생각했는데 마비된 전철(공항철도?)을 골라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느리게 가는 전철에서 시간을 더 허비했다. 그래도 늦지 않게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바쳤다. 

마침내 게이트 앞에 도착해 들어갈 시간이 되었는데, 이번엔 활주로 사정 때문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유럽인들은 ‘원래 포르투갈 저가 항공을 타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라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잡지를 펼쳐들었지만 나는 어느 게이트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 괴상한 시스템에 어안이 벙벙했다. 출장 인생 9년차에 이만큼 당황스런 연착은 처음이었다. 나만큼 당황한 한국인을 한 명 만나 서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끝에 항공사 사이트 구석의 어느 메뉴로 들어가면 연착된 항공기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걸 찾아냈다.

문제는 해결했지만, 이탈리아에서 겨우 4박 5일만 머무를 수 있는 나로선 첫날 대부분을 공항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크나큰 비극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비극은 약간의 행운으로 바뀌었다. 내가 갑자기 생긴 일행과 모처럼 한국어를 쓰며 여행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아까부터 묘하게 눈에 띈 남자가 근처에서 두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이 보였다.

뿌리는 검지만 나머지는 금발인 단발머리를 귀 뒤로 대충 넘겼고, 느끼해지기 쉬운 벨벳 자켓을 몸에 딱 맞게 입은 남자였다. 그는 페데리코 발차레티였다. 발차레티는 내가 직접 취재한 유로 2012에서 이탈리아의 주전 풀백이었고, 무엇보다 토티의 전 동료이자 현재 직장 동료(로마 디렉터)였다. 발차레티의 아내가 파리에서 일하는 발레리나라는 건 알고 있었다. 파리의 집에서 로마의 집으로 건너가는 길에 나와 마찬가지로 발이 묶인 것이다.

나는 발차레티에게 말을 붙이기로 했다. 기자로서, 축구인에게 팬심을 표현하는 건 금기시되는 행위다. 그러나 그 자리의 나는 취재가 아닌 휴가 중이었고, 파리에서 발차레티를 만나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깎여나갈 위신도 없었다. 발차레티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불러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니 그는 씩 웃으며 반겨 줬다.


그런데 기자가 아니라 팬의 마음으로 다가가고 나니 행동거지도 팬처럼 되어버렸다. 발차레티는 영어도 그럭저럭 하는 편이기 때문에 평소 같으면 이것저것 캐물으며 책에 쓸 멘트 몇 마디라도 받아냈을 텐데, 그날은 어버버버 거리며 겨우 1분 정도 대화한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발차레티가 다시 아이들과 놀아줘야 할 시점이었다. 결국 내 손에 남은 건 자신의 모습이 엉망일 뿐 아니라, 발차레티의 고상한 외모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셀카 한 장이었다.

괜찮았다. 토티의 발자취를 느끼러 가는 길에 토티의 동료이자 친구인 사내를 만났다는 건 묘한 운명처럼 느껴졌다. 발차레티와 같은 비행기를 타고 로마의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향했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알프스와 지중해는 벌써 환상적이었다. 로마에서 한 일이라고는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은 것이 고작이었지만, 대충 아무데나 들어간 숙소 근처(테르미니 역 근처)의 작은 식당은 ‘짜고 맛있는 파스타’ ‘한국에서라면 이렇게 단촐한 재료만 넣고 팔 리 없지만 막상 먹어보면 버섯 향이 만족스런 피자’ ‘커피를 달라고 하면 당연히 나오는 에스프레소’ ‘여유롭게 가곡을 부르며 서빙하는 뚱뚱한 대머리 직원’ 등 이탈리아 식당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를 모두 충족시켰다. 그렇게 첫 날이 흘러갔다. 이튿날은 로마 관광을 약간, 토티에 대한 답사를 약간 하기로 대충 계획을 짜고 잠이 들었다.


Janelle Monáe의 'Dirty Computer'에 영향을 미친 것들 왼쪽 서랍


'리드머'에 기고한 글입니다. 

자넬 모네이(Janelle Monáe)가 4년 7개월 만에 새 앨범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모네이는 몇 장의 싱글을 제외하면 사회 운동과 영화 출연 등, 음악 외적인 작업에 더 집중해왔다. 새 앨범 [Dirty Computer]는 앞선 앨범 3부작과 비슷한 메시지를 공유하면서도 음악적으로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Dirty Computer]는 모네이의 점진적인 변화가 담긴 앨범이다. 그동안 모네이가 겪은 일들과 그 사건들이 새 앨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리했다. 우리 시대의 프린스(Prince), 모네이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키워드들이다.

Yoga

모네이는 2015년에 개인 작업보다 본인이 설립한 독립 레이블 ‘원더랜드 레코드(Wondaland Records)’를 안착시키는 데 더 비중을 두는 듯했다.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 지데나(Jidenna), 로만 지안아서(Roman GianArthur) 등이 참여한 단체 앨범 [Wondaland Presents : The Eephus]가 대표적이다.

모네이는 이 앨범에서 가장 잘 알려진 노래 “Yoga"를 지데나와 함께 작업했다. 사운드만 들으면 평범하고 개성 없는 노래처럼 느껴지지만, 가사에는 모네이 특유의 당당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나를 위한 은밀한 댄서는 바로 나니까’, ‘내 가슴에서 손 떼’ 등의 가사는 [Electric Lady] 수록곡 “Q.U.E.E.N”에서 ‘내가 거울을 보며 혼자 트워크를 하는 게 이상해?’라고 질문했던 가사에 대한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에는 여자들끼리 춤을 추며 요가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배우 테사 톰슨(Tessa Lynne Thompson)이 카메오처럼 등장한다. 톰슨은 [Dirty Computer]와 함께 공개된 동명의 46분짜리 영상에서 모네이와 함께 주인공을 맡았다. 이 영상이 각 수록곡의 뮤직비디오 역할도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당수의 뮤직비디오에 톰슨이 출연한다.

많은 사람들이 톰슨과 모네이가 이번에 처음 힘을 합친 줄 알지만, 사실 이들의 호흡은 “Yoga”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Dirty Computer] 영상에 모네이와 톰슨의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오고, 둘이 평소에도 붙어 다니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되자 ‘사귀는 것 아니냐’는 가십이 나왔다. 모네이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모네이는 이번 앨범에서 범성애자(pansexual)로서의 정체성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Prince의 죽음

2016년은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신비로운 슈퍼스타였던 프린스(Prince)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가 세상을 떠난 해다. 둘 다 모네이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뮤지션들이다. 특히, 2016년 4월 사망한 프린스는 모네이와 인연이 깊다. [Electric Lady] 수록곡인 “Givin Em What They Love”에 프린스가 참여했다. 프린스는 이후에도 모네이와 교류를 이어가는 중이었고, [Dirty Computer]의 작업을 도왔다.

모네이는 최근 인터뷰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지만, 그가 그립다. 그의 영혼은 날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모네이는 범성애적이면서 섹시한 이미지,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 세계, SF 콘셉트 등 여러 면에서 프린스를 계승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동안 모네이의 음악은 프린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제임스 브라운(James Brown) 등등, 다양한 선배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은 혼합물이었다. [Dirty Computer]는 프린스에게서 받은 영향이 압도적인 비중으로 드러난 앨범이다. 이 앨범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TR-808 드럼 사운드를 입은 프린스 음악의 재창조’라고 할만하다.

소울과 재즈 같은 장르의 색채는 옅어진 대신 프린스에게서 물려받은 펑크(Funk), 때론 록에 가까운 사운드가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프린스를 연상시키는 수록곡 “Make Me Feel”은 실제로 프린스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린스의 DJ였던 렌카 패리스(Lenka Paris)에 따르면, 프린스가 평소 연주했던 신시사이저 라인이 이 곡에 쓰인 걸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Fem The Future’

모네이는 일종의 사회 운동가로도 활동해왔다. 흑인 인권 시위에서 부르기 좋은 노래 “Hell You Talmbout”을 원더랜드 레코드 아티스트들과 함께 만들어 무료 배포한 것이 한 예다. 할리우드의 화두인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모네이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특히, 2016년 9월부터 페미니즘 운동 ‘Fem The Future’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모네이는 이 운동의 이름으로 여러 아티스트를 초대하여 연대하는 행사를 여러 번 가졌다.

흑인 인권운동과 여성운동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모네이의 행보는 음악 세계에도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모네이의 가사에서 페미니즘은 간접적으로만 반영돼 있었다. 반면, [Dirty Computer]에는 ‘fem the future’라는 가사가 직접 등장할 뿐만 아니라 ‘hit the mute button, let the vagina have a monologue(음 소거 버튼을 누르고 질이 독백을 하게 해)’를 비롯해 페미니즘 선언문에 가까운 라인이 가득하다.

싱글 “PYNK”는 ‘여성의 몸 안에 있는 분홍색 신체부위’, 즉 여성 성기에 대한 노래인데, 이를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옷을 입고 뮤직비디오에 출연하기도 했다. 모네이의 성기 모양 바지 사이에서 톰슨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은 행위예술에 가까워 보인다.

가사가 너무 직접적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게 되면 예술로서의 가치는 떨어질 수도 있다. 모네이는 가사를 노골적으로 쓴 대신, 음악의 형식과 감정을 섬세하게 조절함으로써 함정을 피해간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모네이 특유의 가창력 대신 내밀한 화법의 비중이 늘었다. 반대로 랩의 비중을 늘려 직설화법에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문라이트’와 ‘히든 피겨스’

모네이는 2016년 말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배우로 본격 데뷔했다. 둘 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이다. 동성애자 흑인의 성장기를 다룬 [문라이트, Moonlight], 나사에서 일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Hidden Figures] 모두 모네이의 음악세계와 일맥상통한다. 한 아티스트의 음악과 배우 활동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드문 사례다.

특히, [히든 피겨스]에서 모네이가 맡은 과학자 메리 잭슨은 모네이의 캐릭터 그 자체다. 모네이는 “Django Jane”의 가사 'We ain't hidden no more, moonlit nigga, lit nigga‘를 통해 두 영화를 활용한 펀치라인을 썼다.

한편, [히든 피겨스]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함께했던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는 [Dirty Computer]의 수록곡 “I Got The Juice”의 프로듀싱과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모네이는 퍼렐이 주도한 [히든 피겨스] 사운드트랙에서 유일하게 두 트랙에 참여한 보컬이었다.

필립 K. 딕의 ‘일렉트릭 드림스’

[일렉트릭 드림스, Electric Dreams]는 2017년 5월에 발영된 영국 드라마다. SF 소설의 거장 필립 K. 딕의 단편 10개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10편짜리 옴니버스 작품이다. 모네이는 여덟 번째로 방영된 ‘오토팩(Autofac)’에 안드로이드 역할로 출연했다. 모네이가 음악 속에서 줄곧 연기해 온 캐릭터(신디 메이웨더)와 비슷하다.

‘블랙 팬서’

2018년 1월 개봉한 [블랙 팬서, Black Panther]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첫 흑인 주인공 영화이자 역사상 최초로 흑인들이 모든 주역을 맡은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다. 많은 흑인 예술가들이 이 영화에 찬사를 보냈다. 특히, [블랙 팬서]는 아프로 퓨처리즘을 최초로 영상화한 영화라는 점에서 모네이의 음악과 연결 지어 생각할만하다.

아프로 퓨처리즘은 흑인 인권 문제와 SF를 결합한 장르다. 모네이는 음악으로 아프로 퓨처리즘을 계승해온 대표적인 뮤지션이다. 영화 속에 묘사되는 와칸다는 아프리카 특유의 색감과 첨단 과학기술을 조화시킨 시각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모네이에게 [블랙 팬서]는 자기 음악 속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모네이는 이 영화와 원작 만화에 등장하는 두 가지 개념에서 직접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지구상 최강의 금속으로 묘사되는 비브라늄은 “Crazy, Classic, Life”에 영감을 제공했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와칸다 최강 부대 도라 밀라제는 “Django Jane”의 콘셉트에 영향을 줬다.

모네이는 영화에 등장한 여성 배우들과도 친분을 맺고 있다. 올해 모네이가 주최한 ‘Fem The Future’ 행사에는 [블랙 팬서]에 출연한 루피타 뇽오, [어벤저스 : 인피니티 워]까지 연속으로 출연한 다나이 구리라가 모두 참가했다. 모네이의 친구이자 MCU에서 발키리를 연기하는 톰슨, 넷플릭스(Netflix)가 제작하는 MCU 드라마에 출연 중인 로자리오 도슨 등, 마블 세계관에 있는 흑인 여성 배우 대부분이 모네이와 인연을 맺었다. 루피타 뇽오는 최근 트위터에 모네이의 노래 “Make Me Feel”에 맞춰 춤추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모네이는 앨범 발매 후 가진 인터뷰에서 [블랙 팬서]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다음 영화에 출연하고 싶냐는 질문엔 이렇게 답했다. “물론 영광이지. 라이언 쿠글러 감독, 전화 주세요.” 만약 [블랙 팬서]의 세계가 더 확장된다면, 마블 영화에서 연기하는 모네이를 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블랙 팬서> 단상들 취미생활


- <블랙 팬서>는 개인적으로 감동을 주는 영화였다. 블랙뮤직을 좋아하는 사람들, 특히 네오소울이나 소위 컨셔스 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미국 흑인들에게 아프리카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땅이라는 걸 잘 알게 된다. 디안젤로는 “Africa is my descent / And here I am far from home”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이들이 노래하는 이상향으로서의 아프리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중에서는 탄압받는 흑인 형제, 자매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주는 정기선을 구상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블랙 스타’라는 이름의 그 배를 타고, 선조들이 노예로 팔려온 뱃길을 거슬러간다고 해서 나아지는 건 없다. 아프리카는 이미 열강에 의해 찢어진 땅이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아프리카는 상상의 지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블랙 팬서>의 와칸다는 한 번도 열강의 침탈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오래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과학이 발달되어 있는 풍요로운 아프리카 국가로 묘사된다. 마침내 수많은 미국 흑인들이 가고 싶어 했던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헐리우드의 자본을 타고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그 이미지는 나와 같은 제삼자에게도 감동적이다. 비유하자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책으로만 읽던 샤이어가 처음 눈앞에 펼쳐지던 순간의 경이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티찰라의 투명 비행기가 와칸다 상공으로 들어서는 순간 내 감각에는 즉각적인 반응이 왔다. 오프라 윈프리를 비롯한 미국의 흑인들이 이 영화의 이미지 자체에 찬사를 보내는 건 그들이 희뿌연 상상으로만 갖고 있던 고향의 이미지를 실사화해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맥락을 감안한다면 ‘PC충들이나 좋아할 영화네’ 따위의 비아냥은 큰 실례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한나 비츨러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 비츨러는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와 <크리드>에 이어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함께 했다. 그 사이 비츨러가 거쳐 온 작업은 비욘세의 비주얼 앨범 <Lemonade>와 영화 <문라이트>였다. 페미니스트 흑인 여성과 흑인 게이 남성의 이미지를 매혹적으로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비츨러는 아마도 첫 블록버스터일 <블랙 팬서>에서도 여러모로 강렬한 디자인을 보여줬다.

- <블랙 팬서>는 인상적인 오리지널 송 앨범을 가진 첫 번째 MCU 영화다. 마블은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성공 이후 인상적인 삽입곡들을 통해 영화의 감흥을 끌어올려 왔다. <스파이더맨 : 홈커밍>이 그랬고 <토르 : 라그나로크>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아예 영화를 위해, 혹은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들로 앨범 한 장이 나왔다. 지금 가장 문제적인 래퍼, 가장 뛰어난 래퍼인 켄드릭 라마(켄드릭도 가사에서 블랙 스타를 거론한 적이 있으며, 흑인 인권문제를 엔터테인먼트와 가장 성공적으로 결합한 동시대 예술인이다)가 중심을 잡고 그의 크루인 블랙 히피, 그의 소속사인 TDE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마자 스자와 켄드릭의 목소리로 ‘All The Stars’를 듣는 건 그동안 마블 영화에서 하지 못한 경험이다.
<블랙 팬서>의 오리지널 스코어에 대한 내 엄청난 기대는 반 정도만 충족됐다. 루드비히 괴란손 음악감독은 아프리카를 직접 여행하며 수집했다는 사운드 소스들을 잘 활용한 것 같다. 괴란손은 본업이 힙합 프로듀서인 작곡가답게 리듬을 다룰 때 탁월하다. 타악기 위주로 구성된 스코어는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끌어올린다. 이국적인 느낌의 소리들을 적당히 이용해먹은 <라이언 킹>의 음악과 비교해 보면, <블랙 팬서> 쪽이 훨씬 더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존중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반면 기억에 남을 만한 테마가 없다는 마블 스코어들의 공통적인 문제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아무래도 대규모 작업이 처음이라 그런지 <크리드>에 비해 괴란손의 개성은 잘 드러나지 않은 것 같다.
괴란손은 808 드럼을 적극적으로 쓰는 (아마도 유일한) 영화 음악 감독이다. 힙합 비트의 가장 대표적인 드럼 머신인 TR-808은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감각적인 소리를 내지만, 한때 너무 가볍고 깊이가 없는 악기로 취급됐다. 그러나 트랩 비트메이커들이 10년 넘게 꾸준히 연구해 온 결과 이제 미국 팝 음악에서 808은 비장미와 긴장감을 고조시킬 때 대표적으로 쓰이는 악기가 됐다. 괴란손은 종종 빠르게 몰아치는 808 질감의 힙합 비트를 삽입해 씬의 속도감을 확 끌어올린다.

- 괴란손 중심으로  보는<블랙 팬서> 인맥도. 일단 괴란손은 라이언 쿠글러, 마이클 B. 조던과 함께 세 편째 작업한 동지들이다. 그러므로 쿠글러 중심이 인맥도는 괴란손을 중심으로 놓아도 똑같이 성립한다. 괴란손은 쿠글러, 조던, 비츨러, 촬영 감독 레이첼 모리슨(마블 최초의 여성 촬영감독이기도) 등과 다시 뭉쳤다. 괴란손은 <크리드>에 테사 톰슨의 밴드 멤버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톰슨은 토르 시리즈의 발키리 역할을 맡아 한 발 먼저 MCU에 합류했다.
괴란손의 영화적 동지가 쿠글러라면, 음악계 동지는 도날드 글로버(aka 차일디시 갬비노)다. 원래 시트콤 작가인 글로버는 <블랙 팬서>에도 일부 참여해 유머러스한 대사들을 썼다. 물론 <스파이더맨 : 홈커밍>을 통해 MCU의 배우로 먼저 합류한 바 있다.
이건 좀 억지지만... 와카비 역을 맡은 다니엘 칼루야 역시 괴란손과 약간의 연결고리가 있다. 칼루야를 스타덤에 올린 <겟아웃>의 명장면에 괴란손이 만들고 글로버가 부른 노래가 깔리기 때문이다. 칼루야가 처음 등장할 때 흐르고 있던 'Redbone‘이다. 칼루야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한다.

- 아니, 아프리카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온통 흑인만 나오는 대자본 오락영화라니? 나는 눈 앞에서 펼쳐지는 비주얼에 잠깐 얼떨떨해 했고, 영화가 끝난 뒤에는 디즈니의 변화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봤다. 디즈니는 20여년 전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에 전세계의 온갖 소재를 가져다가 소재로 썼다. 고전 동화, 아메리카 원주민, 중국 설화, 외계인 등등 닥치는대로. 그중 아프리카를 소재로 한 것이 <라이언 킹>이었다. 그러나 <라이언 킹>은 패권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디즈니는 다시 한 번 다양한 소재를 흡수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MCU라는 거대한 시리즈물에 속한 영화들은 서로 조금씩 다른 개성을 가져야만 지루함을 피할 수 있다. <윈터 솔저>는 정치 스릴러, <앤트맨>과 <라그나로크>는 코미디, <홈커밍>은 청춘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를 가져와 동어반복을 피했다. <블랙 팬서>는 블랙 무비라는 새로운 세계를 MCU로 끌어들였다. 이 대목에서 <라이언 킹>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는데, 20년 만에 많이 PC해진 헐리우드는 <라이언 킹> 때의 실수와 달리 <블랙 팬서>를 정치적으로 꽤 공정한 영화로 만들어냈다. <블랙 팬서>의 여러 묘사에는 딱히 불편한 곳이 없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주체적이고, 와칸다는 원작처럼 숨어지내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여하려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아무런 발전 없이 왕위 쟁탈전만 벌였던 <라이언 킹>의 심바에 비하면 <블랙 팬서>의 티찰라는 훨씬 사려깊은 주인공이다. (물론 멋이 없다는 건 둘이 똑같다)

(이하 스포일러)
- 원작의 와칸다와 블랙 팬서는 이번 각색을 통해 한층 깊이 있는 이야기로 재탄생했다. 티찰라가 아버지 티차카의 노선을 버리고 더 적극적인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변증법적이다. 킬몽거는 만화 주인공 이름 블랙 팬서가 아니라, 미국에 실존했던 무장 단체 블랙 팬서의 사상을 과격한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다. 킬몽거의 문제는 그가 사이코패스인데다 비뚤어진 살인귀라는 점이지 그의 사상이 아니다. 티찰라는 킬몽거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와칸다의 힘을 전세계의 흑인 사회를 위해 쓰기로 결심한다. 블랙 팬서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가지 세계가 사상투쟁을 벌이다 결국 진보를 이뤄낸다는 플롯.
젊고 재능 있는 흑인 배우들을 잔뜩 기용해 보는 맛이 있다. 채드윅 보스만은 그저 중심을 잡을 뿐이고, 조연 배우들의 에너지가 훨씬 강렬하다. 마이클 B. 조던, 루피타 뇽오, 다니엘 칼루야는 물론이고 <문라이트>에서 리틀 역을 맡았던 소년까지 잠깐 출연.
이 영화의 최대 수혜자는 킬몽거를 맡은 조던일 것이다. 그는 강렬한 캐릭터를 소화할 만한 에너지를 지닌 배우다. 특히 상처 받고 억울한 영혼을 표현하는 건 그의 특기다. 악역이 빈약한 MCU 세계에서 킬몽거는 강렬한 비극성과 품위를 겸비한 첫 악역이다.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와 <크리드>를 거쳐, 쿠글러와 조던의 호흡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움직인다. 마지막에 죽지 않고 살아나 다음 영화에도 출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왜 켄드릭의 노래들이 자꾸 티찰라보다 킬몽거에 대한 테마를 다루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킬몽거가 훨씬 영감을 주는 캐릭터잖아.
반면 액션이 빈약하다는 불만에는 어느 정도 공감한다. <크리드>를 만든 감독의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타격감이 약했다.

<문라이트>, 랩 속에 박제된 마약상의 이미지를 구원하다 취미생활


한줄요약 : 영화 <문라이트>에 대해, 영화를 여는 노래가 불러온 연상작용으로 시작해 요즘 힙합 가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글입니다.

빈민가 출신 흑인 소년의 성장담은 영화에서 그리 흔하지 않지만, 힙합 음악에선 지겹도록 반복된 소재다. 래퍼들은 대부분 자전적인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음악에 그대로 투영하기 마련이다. 그들 중엔 마약상 출신, 유명 갱단 출신 래퍼들도 수두룩하다. 거리 출신이 아닌 래퍼들도 마치 강박관념이 있는 것처럼 dope, drug, ice, skurr 등 마약과 관련된 표현을 노래에 넣는 게 일상적이다. 이제 마약에 대한 가사는 어떤 비장미도 없이 그저 유희의 도구로 쓰인다. 마약과 범죄에 대한 서사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고착된 장르적 특징이 됐다. 
다른 래퍼들이 틀에 갇혀 있을 때, 켄드릭 라마는 한 발 벗어난 시선으로 걸작을 만들었다. 메이저 데뷔작 <good kid, m.A.A.d city>는 폭력이 일상화된 LA 컴튼에서 켄드릭 자신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야기한다. 치밀한 영화적 구성, 갱스터 랩의 전통을 계승하고 비틀어 만드는 장르적 진보를 통해 이야기한다. 여느 래퍼들처럼 ‘마약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우린 너무나 비장하고 그게 우리의 현실이지’라는 투로 현실에 안주하며 멋있는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삶이 켄드릭이라는 개인에게 얼마나 끔찍한 상처를 남겼는지 이야기하며 폭력에서 벗어날 것을 다짐한다. 그 과정은 전에 없이 감동적이다. 폭력에 매료된 일군의 래퍼들, 폭력을 멀리하라고 훈계를 하는 일군의 (약간 지루한) 지적인 래퍼들 사이에서 켄드릭은 가장 예술적인 지점을 찾아낸다.
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완결된 것처럼 보였기에, 두 번째 앨범이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2015년 나온 <To Pimp a Butterfly>는 세간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첫 트랙 <Wesley's Theory>에서 웨슬리 스나입스의 탈세 문제가 인종차별에서 비롯됐다는 음모론을 인용하며, 연예인이 된 현재의 켄드릭도 인종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걸 단박에 선언하고 시작한다. 전작이 LA 힙합을 계승하고 비틀었다면, <TPAB>는 흑인 선배들이 해 온 재즈, 훵크, 힙합 등 모든 장르를 앨범 하나 속에서 동시에 계승한다. 켄드릭은 메시지의 외연과 형식의 외연을 동시에 확장하며 자신의 걸작을 뛰어넘었다.

<TPAB>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문라이트>의 도입부에서 기시감을 느낀다. 보리스 가디너가 부르는 “모든 검둥이는 하나의 별”이라는 노래로 시작된다는 점이 두 작품의 큰 공통점이다. 원래 히트한 노래였던 <Every Nigger Is A Star>는 켄드릭의 앨범을 여는 첫 샘플링 곡으로 선택돼 2015년의 청중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2016년에는 극장의 관객들도 이 노래를 잊을 수 없게 됐다.
<TPAB>는 2015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지 못해 엄청난 논란이 일었을 정도로 유명한 앨범이다. <문라이트>의 관객, 특히 흑인 관객 중엔 1년 전 <TPAB>를 통해 이 노래가 익숙한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다. 미국의 많은 미디어들도 두 작품의 연결고리를 지적했다. 켄드릭의 잔상이 영화의 첫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베리 젠킨스 감독은 정면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 연상작용은 영화의 감상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의미를 풍부하게 느끼도록 돕는다. 주인공 샤이론의 삶은 수많은 래퍼들이 이야기해 준 흑인 소년의 전형적인 성장 과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는 약쟁이인 소년이 마약상을 유사 아버지로 삼아 성장해야 하는 곳. 우발적인 폭력으로 전과가 생긴 청소년이 살아남기 위해 마약상이 되는 곳. 3장으로 구성된 영화에서 1부와 2부의 샤이론이 아직 유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 반면, 3장의 샤이론은 갑자기 근육이 잔뜩 붙은 당당한 마초(물론 영혼은 그렇지 않다)의 외모로 바뀌어 있다. <문라이트>는 샤이론이라는 개인에 집중하고 있지만 어머니와 후안의 언쟁 등 샤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마을의 현실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럴 때 <Every Nigger Is A Star>를 통한 연상작용은 <문라이트>를 더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고발 드라마처럼 느끼게 만든다.
동시에 <문라이트>는 장르 안에 박제되어 버린 흑인 마약상이라는 소재를 구체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되살려냈다. 이 영화가 기존의 게토 이야기와 다른 건, 물론 샤이론이 동성애자이며 자신의 정체성에서 기인한 슬픔을 안고 살아왔다는 점이다. 샤이론의 가슴엔 메워지지 않은 구멍이 있고, 우린 배우의 눈을 통해 그 구멍이 얼마나 깊고 먹먹한지 느낄 수 있다. 3장에서 샤이론을 연기한 트레반트 로즈는 스포츠 스타의 근육(부상으로 은퇴하기 전엔 100m 달리기와 풋볼 선수였다고 한다)과 50센트를 닮은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눈빛은 슬프다. 슬픈 눈의 50센트라니. 로즈의 근육과 눈빛이 일으키는 부조화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 중 하나다.
힙합 음악이 익숙한, 특히 남부 힙합(샤이론이 3장에서 마약상으로 일하는 지역이 애틀랜타다)을 즐겨 듣는 사람들은 마약상 이야기에 아무 감흥이 없을 정도로 무덤덤해진 상태다. 그들은 <문라이트>를 보고 비로소 감각이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장르적으로 추상화된 마약상이 아니라, 실제로 어딘가 존재할 슬픈 마약상의 이야기를 통해 이 닳고 닳은 소재는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문라이트>는 진부한 힙합의 서사를 진화시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술 면에서도 ‘마약 랩’의 한계를 대신 깨뜨려주는 느낌이다. 수많은 래퍼들이 거리의 현실과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구체적이고 생생한 묘사를 늘어놓지만, 클리셰 속에서 아무리 디테일을 더해도 거기엔 살아있다는 느낌이 부족하다. 오히려 <문라이트>는 리얼리즘에서 벗어난 미학을 통해 주인공 개인의 감정과 영혼에 다가갈 수 있게 하고, 흑인 마약상 이야기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다. 게토 버전의 마술적 리얼리즘.

인상적인 음악으로 가득한 <문라이트>에서 블랙(샤이론)과 케빈이 차를 타고 이동할 때 흘러나오는 <Classic Man>은 약간 이질적이다. 지데나와 로만 기안아서(둘 다 원더랜드 레코드 소속 아티스트이며, 테레사 역으로 출연한 자넬 모네가 이 레이블의 CEO다)가 함께 불러 2016년 그래미 송/랩 콜라보 부문 후보에 올랐다. 지데나는 나중에 ‘지니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 노래가 어떻게 <문라이트>와 어울리는지 설명한다. "나의 음악과 <문라이트>는 모두 흑인의 남성성을 재정의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문라이트>는 평범한 후드(hood) 이야기를 비틀었다. 내 음악도 전형적인 힙합이나 알앤비가 아니다."
지데나, 모네 등 몇몇 아티스트들은 <문라이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흑인의 남성성(black masculinity)을 거론한다. 남성성이란 용어는 보통 남성이 사회에서 습득하는 젠더 정체성을 지칭한다. 빈민가 흑인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은 1장에서 샤이론을 돌봐주는 후안이다. 샤이론은 롤모델로 삼을 만한 게이 남성이 없는 환경(흑인 빈민가뿐 아니라 어디서건 성소수자가 처하기 쉬운 문제로 알려져 있다)에서 그나마 믿고 의지할 만한 후안의 직업과 생활방식을 의도적/운명적으로 복제한다. 그는 블랙이라는 스트릿 네임까지 지었다. 그러나 흑인 남성성을 열심히 모방하는 블랙의 근육 뒤엔 샤이론의 여린 영혼이 있다는 걸 관객들은 계속 느끼고 있다.
흑인 남성성을 흉내 내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어느 밤 해변에서 케빈과 함께 한 비밀스런 기억만이 샤이론을 살아있게 했다. 한 갈래뿐이라고 생각했던 길에서 벗어나 케빈에게로 향할 때 블랙은 비로소 샤이론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흑인 남성성의 클리셰에 빠져 있는 건 수많은 래퍼들뿐 아니라 극중 샤이론 자신이기도 했다. 롤모델을 찾지 못한 샤이론은 자신에게 솔직해지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케빈에게 안겨 있는 샤이론,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파란 달빛 아래 어린 샤이론은 기분 탓인지 더이상 슬픔에 차 있지 않은 편안한 눈빛을 하고 있다.

**마침 요즘은 애틀랜타 출신으로 유행을 선도하는 래퍼 영썩이 앨범 표지에 여장한 사진을 올려도 ‘fag*ot’이라는 백안시를 당하지 않고 개성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힙합계 안의 고정관념이 희석되어 가는 시기다. 랩과 노래의 경계를 오가는 아티스트중엔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걸 당당하게 밝히는 인물도 생겼다. 프랭크 오션, 시드 더 키드같은 성소수자 아티스트들은 흑인음악에 기반을 둔 가장 뛰어난 작업물들을 내놓으며 성별에 따른 역할놀이에 갇혀 있던 흑인음악을 해방시켰다. 그런 면에서 <문라이트>는 팝계의 흐름과도 잘 조응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는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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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올려두는 탄핵 일기 일기(2016.07~ )

어떤 기분이었는지 나중에 잊어버릴까봐

2012년 12월, 파리에 착륙하자마자 데이터로밍을 켜고 네이버 메인을 확인했을 때, 박근혜 후보 당선 확정적이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보였다. 우린 신혼여행 첫날을 조졌다. 유독 공동묘지를 많이 갔던 신혼여행에서 드레퓌스의 묘를 찾았을 때 아내와 나는 '앞으로 박근혜가 대통령인 한국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다짐을 했다. 코미디 같은 장면이지만 그땐 정말이지 웃기 힘들었다.

오늘, 탄핵이 부결될까봐 불안해하며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던 시간, 시위 현장의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고 둘다 표결 직전까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박근혜와 우리 결혼의 악연이 끝나길 바라며 샴페인을 땄다. 가결 축배인지 결혼기념일 축배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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